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폰 파펜 (문단 편집) === [[아돌프 히틀러|악마]]와 손을 잡다 ===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와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속셈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하자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슐라이허에 대한 복수, 아니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복수에 들어간다. 총리직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슐라이허를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나치와 다시 손을 잡았던 것. 국방부에서 뒷조사나 하고 [[도청(범죄)|도청]]하면서 정치공작이나 벌이던 슐라이허는 의회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고, 급부상하던 [[나치당]]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멍청한 파펜이[* 사실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랐다. 그냥 느낌으로 알았던 것. 그래서 슐라이허는 파펜이 자신을 증오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덤 앤 더머]]--] 자기를 도와주려 히틀러와 접촉하는줄 알았단다. 한편 의회는 의회 나름 막장이었다. 의회는 해산되었으나 [[청문회]]는 열렸는데, 대통령의 친구들이 [[횡령|농업보조금을 해먹은게]] 까발려지면서 위기 상황이 온 것. 힌덴부르크는 "정치공작에 능한 저놈이 그것도 못 막는건가, 아니면 일부러 안 막는건가"하고 의심했고, 여기에 더해 농민단체가 "수입농산물 관세 내린 총리 때문에 못살겠다"라고 징징거리면서 역시 동부 지주출신인 힌덴베르크는 슐라이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펜은 뒤늦게 정치적 포텐을 다시 터트린다. 이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까지 구워삶았고, 대통령 비서실장,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오스카어]]와 함께 팔순 노인 앞에서 히틀러 찬양에 나섰다. 총애하던 파펜의 설득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다시 보게 되었고 슐라이허 경질을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린 슐라이허는 자신을 믿고 의회를 해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팔순 노인은 해산-재선거-해산-재선거에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었다.[* 저 병림픽이 몇년에 한번 벌어진 수준이 아니라 '''몇 달에 한번씩 벌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뤼닝 내각이 [[1932년]] [[5월 30일]]에 무너진 후 파펜 내각이 두 달 뒤인 7월에 세워졌는데 '''넉 달'''만에 무너지고 다음에 들어선 슐라이허 내각은 두 달만에 무너졌다. 이따위 상황에 힌덴부르크가 진저리가 나지 않으면 이상할 일.] 슐라이허는 예전에 의회 해산하면 폭동난다고 거짓말쳤던 전력이 있는데, 이번에도 폭동 벌어지면 어쩔 거냐는 힌덴부르크의 퉁명스런 질문에 슐라이허는 '''"이번엔 군대가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 군과 프로이센 경찰병력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했다고 한다.] 라며 말을 뒤집어 힌덴부르크를 격노시켰고,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획책한다는 루머까지 돌아서 결국엔 슐라이허는 사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파펜은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여 히틀러를 총리에 취임시키고, 자신이 부총리에 프로이센 경찰청장을 겸직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으며 [[1933년]] 3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한다는데 합의했다. 여기에 나치만으로 부족한 의회 의석 확보를 위해 [[독일 국가인민당]]까지 끌어들여 연립내각의 구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디스질, 선동질이나 일삼던 히틀러가 총리 되는 것에 반대하던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설득한 장본인도 바로 파펜. 심지어 의회 과반 확보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는 '''"제가 속한 [[가톨릭 중앙당]]도 연립내각에 참여합니다."''' 라고 구라까지 쳤다.[* 당시 독일 의회는 제적의원 584명이었고, [[나치당]]의 196명과 [[독일 국가인민당]]의 52석을 합쳐도 과반에 미달했기에 70석의 [[가톨릭 중앙당]]이 합류해야 의회 과반을 확보하는 안정적인 내각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펜은 총리직을 수락한 당시 허락을 얻지 않은 덕분에 당에서 쫓겨난 외톨이였고, 당연히 당의 연립내각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을 사용하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가 아닌 의회 내각의 총리로 임명하여 원내 과반수 의석을 달성하기 어려운 총리를 자신의 영향력에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와 파펜은 [[가톨릭 중앙당]]과 힌덴부르크에게 의회내각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위해 법무장관직은 공석으로 해놓고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가톨릭 중앙당에선 내심 연정이 요청이 오면 검토하자는 입장이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히틀러는 의회 결의를 필요로 하는 내각은 할 생각이 없었고 이미 총리가 사실상 내정된 마당에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만을 원했다. 그리고 연립정부 파트너 [[독일 국가인민당]]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가톨릭 중앙당]]이 연립정부에 끼어들면 자신이 맡기로 한 농업장관, 경제부 장관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톨릭 중앙당의 합류는 극심하게 반대했고, 중앙당과 연립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베를린 정계에선 이미 [[1933년]] 초 이미 슐라이허 경질설이 나올 때부터 새 내각은 파펜 내각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1월 30일]] 내각이 출범할 때 임명장 받으러 온 장관들은 그제서야 히틀러 내각인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힌덴부르크에게 임명장 받기 직전까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재선거를 하자느니, 내각 참여 안한다느니 [[병림픽]]을 벌이는 등 코미디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연정이 구성되고 힌덴부르크 앞으로 임명장 받으러 갈 때까지 갈등이 있었는데, 내각 출범 후 3월에 재선거를 한다는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뒷통수 맞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뛰쳐나가라고 했던 것. 이에 히틀러가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내각 인적구성은 유지한다고 또 지키지 않을 거짓말로 간신히 달랬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연방 및 프로이센 경제/농업 장관으로 선임되었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